리하르트 분쉬 박사

리하르트 분쉬 박사

리하르트 분쉬 박사 (Dr. Richard Wunsch, 1869~1911)

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 한국명 富彦士 1869-1911)박사는 1901년부터 4년간 고종의 시의(侍醫)로 일하면서 당시 세계 의술의 선도적 위치에 있던 독일의학을 한국에 전파했던 한국 최초의 독일인 의사입니다.

그는 1869년 독일 슐레지엔의 히르슈베리크에서 제지공장을 경영하던 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1894년 그라이프스발트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당시 유명한 내과의였던 피르호 교수 아래서 수련의로 일했으며 일본 황실의 시의이자 도쿄대학 내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벨츠 박사의 주선으로 1901년 11월 고종의 시의로 한국에 왔습니다. 분쉬는 약 4년간 고종을 진료했으며 고종이 자주 감기를 앓는 원인으로 집무실의 비과학적인 난방구조와 비단옷의 열전도 문제 등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분쉬 박사는 개인 진료소를 열어 민간 의료봉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근대적인 방역대책을 처음으로 입안하여 실행했던 의료정책가이기도 했습니다. 1902년 서울에 육군위생병원이 설립되자 분쉬는 미국인 의사, 일본인 의사 한 명과 함께 고문으로 위촉 받았고 그 해 여름, 콜레라가 만연하자 콜레라 방역에 필요한 항목을 구체적으로 나열한 건의문을 내부 대신에게 보내기도 하고 직접 방역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한독의학교류백년사' (한독의학회, 1994)에 따르면 그의 이와 같은 활동은 당시 보건정책과 방역대책을 수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더불어 그는 당시 서울에 체류한 의사 가운데 외과 수술에 있어 가장 탁월한 것으로 평가 받기도 했습니다.

분쉬박사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압력으로 1905년 4월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2년 가까이 머문 뒤 유럽으로 돌아갔으나 1908년에 중국 청도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얻어 아시아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열악한 병원 환경과 격무로 장티푸스에 걸려 1911년 3월 4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성격이 매우 치밀했던 것으로 보이는 그는 한국에 머물렀던 4년 동안의 경험들을 일기와 서신 및 사진 등의 자료로 꼼꼼하게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자료들은 그의 타계 후 65년 만인 1976년, 그의 딸인 게르트루트 클라우센 분쉬 여사에 의해 출판되었으며 한국에서는 학고재가 지난 1999년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했습니다.

리하르트 분쉬는 구한 말, 한국의 전통의학과 서구의학을 연결해주는 교량 역할을 한 훌륭한 선구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분쉬의학상은 이러한 리하르트 분쉬 박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한편,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이른 한국 의학계의 학술 발전을 도모하고 의학 분야에서 한·독 양국의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대한의학회와 한국베링거인겔하임이 지난 1990년 9월 공동으로 제정하였습니다.